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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국과 왜구의 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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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17 22:16

울릉도·독도지역은 후삼국의 혼란기를 거쳐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우리의 강역내에 존재하였다.

고려 태조 13년(930), 후삼국의 주도권이 고려로 넘어가자 우산국은 왕건에게 래조(來朝)와 함께 방물(方物)을 바쳤다. 고려가 새로운 통일왕조로 등장한 후 고려 중앙정부로부터 우산국(于山國) 혹은 우릉성(羽陵城)으로 불리면서, 고려의 동해안 외곽 방어선 역할을 수행하며 본토와 지속적인 문물교류를 통해 번성해 갔다.

의종 11년(1157)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 김유립(金柔立)의 우릉성 조사보고에서 당시에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지만 '석불(石佛)·철종(鐵鍾)·석탑(石塔)' 등이 있었다는 것은, 적어도 11세기 여진족의 침입으로 인해 이 지역이 황폐화하기 이전까지는 본토의 수준 높은 불교문화가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산국은 대체로 고려전기 현종대 이후 급격히 황폐화 되었으며, 그 결정적인 요인은 여진족의 침입이었다.

우산국이 여진족의 대대적인 침입을 받은 것은 현종 9년경으로 추측된다. 고려는 즉시 우산국에 농기구를 보냈으며, 다음 해(현종 10년, 1019)에는 여진족 침입 당시 본토로 피난했던 우산국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산국의 피폐상황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던 듯 하며, 이에 현종 13년(1022)에는 본토에 피난했던 우산국 사람들을 예주(禮州-지금의 영해지역)에 정착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고려사}에는 그로부터 10년 후인 덕종 원년(1032) "우릉성주가 아들 부어잉다랑을 보내어 토물을 바쳤다(羽陵城主 遣子夫於仍多郞 來獻土物)"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우산국의 피폐가 어느 정도 복구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진족의 대규모 침입 후 본토로의 이주는 계속되었던 듯 하며, 이후 우산국의 번성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여진족의 침입이후 약 100여년이 지난 인종 19년(1141)에는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 이양실(李陽實)이, 의종 11년(1157)에는 명주도 감창사 김유립(金柔立)이 울릉도에 주민 이주와 관부설치가 가능한 지를 조사하였다.

그 후 1170년(의종 24)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이후 계속된 국내외 정세의 불안과 1231년(고종 18)부터 시작된 몽고의 침공으로 인해 옛 우산국 혹은 우릉성지역에 대한 개발은 보류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장기간에 걸친 몽고군과의 치열한 전투로 전국토가 황폐화되고 있던 고종 30년(1243), 울릉도에 동해안 주민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당시 이주가 실시된 이유를 살펴보면, 우선 대몽항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육지의 주민들을 산성(山城) 혹은 해도(海島)로 이주시킨, 중앙정부의 산성·해도 입보책(山城海島入保策)의 일환으로 볼 수 있으며, 다음으로 불력(佛力)을 빌어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전쟁 중 피란 수도 강화경(江華京)에서 혼신의 열정으로 판각되었던 강화경판고려대장경(江華京板高麗大藏經, 일명 八萬大藏經)의 재목(材木)을 구하기 위한 노력으로도 볼 수 있다.

풍파로 인한 익사자가 많이 발생함으로써 이주정책은 결국 철폐되고 말았지만, 이 시기에 울릉도로 이주한 사람은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몽고와의 강화 이후 원의 대목(大木)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려정부는 울릉도에서 벌목을 행하였다. 대규모로 이루어진 벌목으로 현지민들의 고초가 심했으며, 이 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다시 본토로 도망했으리라 생각된다.

원간섭기 동안에도 울릉도·독도지역에 대한 지배는 계속되었다. {고려사}에는 충목왕 2년(1326) "동계의 우릉도인이 래조(來朝)하였다(東界芋陵島人來朝)"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동계(東界)란 오늘날 강원도와 함경남도 일원으로 고려의 지방행정구역이었으며, 우릉도(芋陵島)는 울릉도의 다른 명칭이었다. 독도가 고래로 울릉도의 속도(屬島)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원의 지배를 받고 있는 동안에도 이 지역은 고려의 통치지역 중 하나였으며, 지속적인 본토와의 왕래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가 몽고의 지배를 벗어난 후에도 이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개발은 어려웠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충정왕 2년(1350)부터 본격화되어 고려 말까지 계속된 왜구의 창궐이었다고 생각된다.

{고려사}에는 우왕 5년(1379) 7월 "왜가 무릉도에 보름동안 머물다가 물러갔다(倭入武陵島 留半月而去)"라는 기록이 보인다. 현재 문헌상 우왕대의 기록만 보이지만 왜구의 이 지역에 대한 침구는 충정왕대부터 고려 말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며, 주민의 거주를 어렵게 하였을 것이다.

결국 1392년 조선왕조가 개창된 후 울릉도·독도지역에 대한 개발은 신왕조의 과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구와 이 지역의 피폐는 조선시대 울릉도·독도지역에 대한 통치방식으로 주민의 이주보다는 섬을 비우는 수토정책을 택하게 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고려일대를 통해 울릉도·독도지역은 고려의 영토였으며, 이러한 역사적 경험과 고려시대에 작성된 자료들은 후대에 전승되어, 조선초 {고려사} 지리지를 편찬할 때 이 지역을 고려의 영토로 명기할 수 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이 지역에 대한 정책입안의 기초자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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