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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번의 미학 작품명 : 탄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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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06 13:34

주동호 선생님의 탄광부


저의 스승이신 주동호 선생님은 무엇을 하던 100만번의 연습과

 

아주 열심해서 10년은 입도, 20년은 득도, 30년은 해야 도사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강원도 (강릉, 동해, 삼척, 태백) 지역은 물론 한국사진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셨습니다.

 

위 사진은 너무나 유명한 주동호 선생님의 (완벽한) 대표작 탄광부 입니다.


작품명 : 탄광부 

작자(作者)의 변(辯) :

탄광부 !

그 얼굴은 먹구름처럼 굳게 닫혔어도 날카롭게 치켜 뜬 그 눈망울은 태양을 송두리째 꿰뚫을 무한한 energy를 내 쏟고 있다.

공포와 초조로움이 서렸어도 날카롭게 치켜 뜬 그 눈망울에서 나는 나를 발견하고 배워야 하겠다.

탄광부 !

그에게서 겸허(謙虛)한 인종(忍從)과 끈질긴 의지를 도려내어 태양을 향해 줄곧 줄달음 치리라.

 

1970년 3월경 영감이 떠올라 착상했고 작은 sketch book에 composition을 그려가며 구상하고 구성하기 시작한 지 2개월 여 만에 촬영에 임했으나 완성하기까지에는 2년여가 걸렸습니다.

촬영해서 들어와 현상해 보면 모두가 허사였습니다.

번민과 고민을 하는 가운데 울기도 대 여섯 번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정신적인 문제와 technique의 부족으로 인한 실망이 엄청나게 큰 것이어서 전문 사진가들에게 20여 회 서신을 올렸으나 어느 누구도 회신은 해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2년 여 동안 촬영한 film의 cut 수가 860여 cut에 이르렀습니다.

그 가운데 끝에서 세 번 째 cut로 결정해서 인화한 사진입니다.

1974년 4월 중순에 출품하면서 입상은 생각해 보지도 못했고, 단지 겨우 턱거리를 해서라도 입선권에 들기만 해도 자랑스럽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입상 통보가 도착했을 때도 낙선 통보인 것으로 알고 봉투를 뜯었습니다.

심지어는 ... You have won Top Prize your monochrome print 'Coal Miner'.... 라는 대목에서 잘못 읽은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Negative film을 속히 주최측으로 보내주면 전시용 작품은 주최측에서 제작하고 negative film은 귀하가 '쾰른'시(市)에 체재(滯在)하는 때에 직접 반환한다고 했을 때야 비로소 현실인 것으로 알고 최고상(最高賞)을 획득(獲得)해서 서독(善)(당시)으로 가게 되었다고 해도 아내가 믿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무슨 말이냐? 고 하시기에 입상(入賞)통보(通報)*{영문(英文)으로 typing 되어 있었음}*를 드렸더니 읽어보시면서 눈물을 글썽이시며 '장한 일을 드디어 해 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목을 쓰면서 필자도 눈물을 글썽이고 있습니다.

앞에서 기술한 '작자의 변'은 실은 입상소감이었습니다만 어머니께서 "아범아, 그 입상(入賞)소감(所感)을 들었을 때 꿈보다는 해몽(解夢)이 더 좋은 것으로 느껴진다"고 말씀하시면서 기쁨의 눈물을 감추고 계셨습니다.

시상식(施賞式)에 참석(參席)하기 위해 출국(出國)할 당시의 상황(狀況)은 불행하게도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수속 절차를 진행하면서 받은 고충은 필설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만 30여 년이 지난 지금 류재정선생님의 정성이 담긴 헌신적인 보살핌은 죽는 날까지도 잊을 수 없는 은혜이며, 당시 사진부장님이셨던 정범태선생님의 하늘같은 충고와 격려도 죽는 날까지 갚을 길 없는 은혜입니다.

1974년 9월 28일 김포공항에서 오후 2시 30분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Korea Kimpo → Republic of China Taipei → Hongkong*{KAL편}*→ *{Lufthansa편}*Thailand Bangkok → India Delhi → Greece Athens → Germany Frankfurt → Germany cologne에 도착했습니다.

탑승 시간만 28시간이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할 당시의 상황을 말씀드릴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시 사진협회의 부이사장이 'PHOTOKINA가 무어요?'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동양인으로는 최초의 Top prize 입상이었습니다.

Top prize를 수상한 기록은 전무후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74년은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머금어 주는 해인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Australia의 Adelaide 국제사진전인 Interphot '74에서 입상, 입선을 했으며, 당시 서독 Stuttgart의 'Hobby im Sucher' 사진 contest에서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흑백부문 입상이었으니까요.

 

⊙ 사진은 그냥 지나다가 무엇인가 보여서 찍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무엇이 찍혔느냐? 가 아니라 작가의 양심과 투철한 철학과 사상이 담겨진 그 무엇을 주장하겠느냐? 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제(theme)*{보통 '테마'라고 합니다만}*가 강렬하고 충격적이어야 하며 참신하고 미래지향적인 것이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고민하고 번민하고 하면서 집중적으로 탄광부의 얼굴을 close up하는 데에만 2년여가 걸렸습니다.

따귀도 맞고 멱살을 잡히는 것은 예사였습니다.

앞에서도 기술했습니다만 번민과 고민 속에서도 대 여섯 번씩이나 울었습니다.

고민과 번민 없이는 창작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200자 원고지 네모 칸에 글자를 써넣었다고 해서 문학작품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Apt 앞을 지나는데 '소녀의 기도'가 들려 옵니다.

그런데 그 piano 소리를 듣고 음악을 연주한다고 하지는 않고 piano 소리가 들려 온다고 합니다.

형식을 갖추고 창의적인 표현을 해야만 비로소 문학작품이라고 일컫게 되며, 작곡자가 의도한 주제(主題)를 완전히 소화하고 독창적인 표현을 해야만 음악을 연주한다고 일컫게 됩니다.

독창적인 작품은 쉽게 얻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강렬하고 충격적인 감동이 없으면 이는 작품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진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정진이 필요한 것으로 압니다.

음악, 미술, 문학, 영상미학, 색채미학, 철학, 논리학, 세계문예사조사, 세계사진사조사, 등등의 교양과 소양을 갖추어야만 독창적이고 참신한 작품이 창출되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책을 통해 교양과 소양을 갖추어야만 인격이 형성되어지며 그 이후에 작품이 창작되어집니다.

 

⊙ 사진을 하는 처지에서는 사진 mechanism을 통달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사진과 그에 따른 mechanism을 아주 능숙하게 다루지 못한다면 소유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게 됩니다.

소유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창작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칠십을 훌쩍 넘긴 지금, 나의 대표작을 평생에 걸쳐 한 점(點)이라도 가질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라면, 그는 부끄러움이 없는 행복한 작가일 것이라는 지레짐작을 해 봅니다.

평생을 통해 자신 있게 세상에 내어놓을 수 있는 작품이 단 한 점이라도 있었다고 하는 것은 더 없는 행복이며 행운이라는 생각입니다.

칠십을 넘긴 처지에 사진을 접는다는 것은 생명의 종지부를 찍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시간(時間)의 유한(有限)으로 인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진은 그렇게 짧은 것이 아닙니다.

사진창작이라고 하는 것은 필생(畢生)의 작업이라는 신념입니다.

까닭에 사진은 무한한 영겁(永劫)의 image라는 주장을 하고 싶습니다.

길어졌습니다.

읽으시느라 매우 힘 드셨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송구스럽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해 드리면서......

    

2014년 5월 그리운 주동호 선생님을 생각하며... 송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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